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낙동강 방어선 전투 (문단 편집) === 9월 초 ~ 9월 15일 이전 전투 상황 === 특히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무시하고 곧장 9월 공세를 벌이던 9월 8일, 국군 8사단은 일시적으로 대구와 경주를 잇는 동서축선 보급로의 요지 영천을 상실한다. 이날 [[월튼 워커]](1889년~1950년) 장군은 [[정일권]](1917~1994) 3군 총사령관에게 예고 없이 찾아와 아래와 같은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고 있는 2개 [[사단(군사)|사단]]을 골라둘 것 >지명도가 높은 각계각층 명사들 10만 명의 리스트를 준비해 둘 것 >반공단체의 지도층 및 [[경찰]] 간부들을 민간인 리스트에 포함할 것 >'''[[이승만|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두기 바람'''[* 정일권 회고록 233~238페이지] 정일권은 순간적으로 [[미국]]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해당 명단은 미국이 철수할 때 소개할 인원들의 명단을 짜라는 얘기인데 __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__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당시 철수 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미군의 이러한 생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으로 강행한 1953년도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증명됐다. 행선지는 [[하와이]]나 [[괌]] 또는 [[제주도]]쯤일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정일권은 너무 중대한 문제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개전 초 신속하게 [[몽진]]을 하였던 이승만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라고 화를 내었다.[* 이승만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의 피난을 권유받은 시점도 대략 이때로 추정된다. 품에서 권총까지 꺼내 들면서 딱 잘라 거절했지만, 서울을 버릴 때의 언행을 보면 정말 부산을 끝까지 사수했을지는 미지수다. 만일 미국이 철수를 할 시점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이 철수를 반대했다면 결국 떼놓고 갔을 텐데, 그러면 최후의 선택지는 제주도에 정부를 차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위기는 일시적이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15사단에는 후속 전과 확대 부대가 없었으며, 2군단이 상대적으로 전선이 안정되어 있던 1사단, 6사단에서 병력을 동원하고 육본 예비대까지 끌어모아 영혼의 --한타-- 역습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 [[영천 전투]]에서 무리하게 경주로 향하던 북한군 15사단이 격멸당하고 영천이 탈환되면서 워커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다. 낙동강 전선은 밀리고 밀리다 못해 부랴부랴 만든 전선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이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교전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즉 '''붕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설정한 전선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에게 조금씩만 땅을 양보하면서 지연전을 펼쳤고, 낙동강 전선에 도달한 순간 [[공세종말점|북한군의 전투력에 한계가 오면서]] 지연전이 아닌 '''지역 방어'''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점령한 낙동강 방어선은 애초에 계획한 것과 달랐고 후방의 데이비드선은 장기간 방어에 부적당하여 부산 교두보 철수시 지연전 목적이나 달성할 수준이었다. 이래서 낙동강 방어선의 전선이 일부 붕괴하였을 때 미국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했으므로 부랴부랴 철수 계획을 세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계획 도중에 전선을 다시 회복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광역시|대구]], [[칠곡군|칠곡]], [[영천시|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 왜관 전투, [[영천·신녕전투]], 남쪽의 [[영산]], [[진주시|진주]], [[마산시|마산]] 일대에서 벌어진 영산 낙동강 돌출부 전투, [[마산 전투]] 등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 전선을 절단할 수 있었던 대구를 놓고 벌인 [[다부동 전투]], 대구, 포항을 포위할 수 있는 영천이라는 아킬레스건을 두고 벌인 [[영천·신녕전투]], [[부산]]과 가까운 마산을 두고 벌인 [[마산 전투]]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워커라인 후방으로 적이 침투, 전선이 무너지며 [[적화통일|'''대한민국이 끝장날 뻔했다.''']] 다만 국군과 유엔군들이 밀려 낙동강 전선에 몰림으로써 연적선이 줄어들어 전력보강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공세 종말점에 거의 다다른 인민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 대한민국이 전쟁 발발 직후의 상황을 수습할 기회도 됐다.''' 즉, 아무리 국군이 부실하고 유엔군이 부랴부랴 도와줬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의 공세만 막아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 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전후방의 종심이 짧았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을 돌파당해 적의 남하를 허용했다간 곧바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진행되어 모든 낙동강 방어선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분류:6.25 전쟁/전투]][[분류:1950년 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